Tibet & Dharamsala
티베트와 다람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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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지금, 티베트가 원하는 것 - 하

karuna           조회수 1,751
2013.05.30 13:33


독립 포기에도 중국과 협상은 제자리
2013.05.27 16:09 입력 발행호수 : 1196 호 / 발행일 : 2013-05-29

달라이라마, 97년 미 의회서
“티베트 독립보다 자치 필요”
인민군 철수·인권보장 요구
중국과 입장차 커 협상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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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11월 중국 사천성 아바 티베트자치주 흑수현에 위치한 고일패 사원에서 백교의 활불(사진 가운데)과 함께한 필자(사진 맨 왼쪽). 이 활불의 수제자는 2008년 4월 티베트 시위 때, 흑수현 거리에서 공안에게 총에 맞아 숨졌다.

 

 

2008년은 티베트나 중국정부의 입장에서 매우 긴장되는 한 해였다. 바로 베이징 올림픽이라는 커다란 국가행사를 앞두고 티베트와 중국정부가 첨예한 무력시위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2008년 3월14일, 기다렸다는 듯이 티베트 라싸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400여 명 라마승들의 반(反)중국 유세로 시작된 시위는 라싸 시내를 넘어, 순식간에 사천, 감숙, 청해 등의 주변 티베트인들 거주지로까지 번졌으며 수도인 북경에서는 티베트 학생들이 촛불시위와 연좌농성으로 합세하였다. 그러나 이 3·14 시위는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한 중국 정부의 진압과 늘 그랬듯이(?) 국제 사회의 현실적인 태도와 언론플레이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통합에 문제가 있음을 전 세계가 다시금 알게 되었고 중국은 대외적으로 자존심이 구겼다.


시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인도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2008년 6월4일, 향후 티베트 독립을 추구하지 않고 베이징 올림픽을 지지하겠다는, 삼동활불(三東仁波切) 명의의 공식 확약서를 중국 지도부에 전달했다. 이 서한에서 달라이라마는 중국의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고, 티베트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폭력 사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3·14라싸 시위사태 이후 중국이 달라이라마 측에게 올림픽 파괴 및 폭력 선동, 중국 분열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한 회답이었다. 이에 호응하듯 중국 외교부는 진강 대변인을 통하여 올림픽이 무사히 끝나면 티베트 망명정부와 다시 협상의 테이블에 앉을 것이며 달라이라마 측이 차기 협상의 조건을 주동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3·14 티베트 사태 이후 중국 정부와 티베트 망명정부 사이에는 화해의 분위기와 더불어 비밀리에 몇 차례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사태가 발생한 당시 중국 지도부가 올림픽이 무사히 끝나면 긍정적인 협상 테이블을 만들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달라이라마 측의 개인 대표는 중국 북경과 심천 등지에서 중국 공산당 통일선전부 관리들과 차기 협상의 시기와 안건을 놓고 협의를 벌였다. 양측 대화에는 중국 측에서 티베트 문제를 총괄하는 통일전선공작부의 두청림 부장이 참석했다. 참석한 자리에서 두청림은 “중국은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지역자치제도를 견지할 것이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티베트의 독립과 반독립, 형태를 바꾼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강한 목소리를 냈다. 이를 지켜보던 티베트 망명정부 내 인사들은 대표자 회의를 통해 항의의 표시로 중국 당국이 성의 있는 협상 의지를 보일 때까지 대화를 중단할 것을 달라이라마에게 권고하였다. 결국 중국과 티베트간의 대화는 2008년 11월6일 이후로 완전 결렬됐다.


티베트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발생한 라싸 시위로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원만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에는 또 다시 실패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티베트 망명정부 내부에선 달라이라마의 평화적 대화 노선을 비판하고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노선이 대두하게 되었다.


인도 북서부 히말라야 산맥 고원에 자리 잡은 ‘다람살라(Dharamsala)’는 1959년 이후 오늘날까지 티베트인들의 정체성과 원형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리틀 티베트’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수장은 14대 달라이라마 텐진갸쵸(Tenzin Gyatzo)이며 그는 이곳에서 망명정부를 오늘날까지 힘겹게 이끌어 오고 있다. 1959년에 달라이라마는 망명 후 당시 인도 수상이던 네루(Pandit Nmehru)와 협상 끝에 인도 북서부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주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망명정부는 크게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로 구성되었다. 행정부는 종교, 문화, 내무, 재정, 교육, 방위, 보건, 정보, 국제관계 등을 담당하는 여러 부서로 다시 구성되어 있으며, 사법부에는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를 두었다. 입법부인 티베트 국민대표의회는 지역과 종파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망명정부는 2만 3000여 명이 다니는 83개의 학교를 건립했으며 117개의 불교사원을 설립했다.


달라이라마는 1959년에 인도로 도피하자마자 국제적 활동을 위해 인도 뉴델리와 뉴욕, 제네바, 모스크바, 도쿄, 런던 등에 대표사무소를 열고 비공식 대표단을 파견,  티베트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대부분의 시기에 달라이라마의 이같은 노력은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 정치에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또한 망명정부 역시 조직과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 간 체제의 국제 관계 속에서 비공식적 단체로서 활동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랐다.

중국 정부는 1988년 달라이라마와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세 가지 단서 조항, 즉 ①독립을 회담의 주제로 삼지 않는다. ②티베트 망명정부의 방문은 회담 대표단의 성격이 아니다 ③외국인(제3자)의 참여를 불허한다는 세 가지 불허 조건을 새로 추가로 제시했는데 이는 달라이라마에게 깊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1990년대 달라이라마의 티베트 독립 추구에 대한 포기 발언은 바로 이같은 열악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달라이라마는 1997년 미국 의회 연설에서 “이제 티베트의 독립은 필요 없다. 지금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티베트인들이 진정한 자치를 누림으로써 우리들의 풍속과 독특한 문화, 종교, 언어, 생활방식을 보존하고 계승해 나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를 위해 티베트인들이 사는 지역에 대해 고도의 자치를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는 ‘고도의 자치’(高度的自治)안을 발표하였다. ‘고도의 자치안’은 1987년의 ‘평화 5개 조항’과 함께 현재까지 티베트 망명정부의 기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은 첫째, 티베트의 평화지대 구축 및 인민해방군의 완전한 철수 보장. 두 번째, 티베트 권역의 한족 이주 정책 중단. 세 번째, 티베트인들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요구 존중. 네 번째, 티베트의 생태적 환경 보호 등의 내용으로 티베트인의 기본적 생존권과 종교적 자유와 자치를 보장하면 중국의 주권을 인정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티베트 망명정부의 입장 선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티베트 문제와 관련된 협상은 거의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인권의 본질과 범위를 둘러싸고 망명정부와 중국 정부 간에 일정한 입장 차이가 존재하는데, 중국의 통합적, 집단적 인권관에 비추어 망명정부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권관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계속)   


심혁주 한림대 연구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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